외환은 평생 사업입니다

마지막 업데이트: 2022년 5월 28일 | 0개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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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환은 평생 사업입니다

꿈은 이뤄졌다. 대형 건설사를 경영해보고 싶었다는 최용선 한신공영 회장은 외환위기를 기회로 평생의 꿈을 이뤘다.다음 목표는 ‘한신’이란 브랜드를 더욱 알차게 가꾸는 것이다. 고래를 삼킨 새우. 건설업계에서는 최용선(59) 한신공영 회장을 이렇게 부른다. 불과 8개월 전까지 국내 토목건설업계 400위권의 하도급 회사를 운영했던 그가 시공능력 25위권의 대형 건설업체를 거머쥐었으니 그럴 만하다. 임직원은 모두 합해야 20명, 기껏해야 매출이 100억원대인 협승토건을 경영하던 그가 한신공영을 인수했다. 덩치로 치자면 20배도 넘는 회사다. 그러다 보니 뒤에서 수군대는 사람들이 많았다. 최 회장은 그러나 “털끝만큼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며 “외환위기 덕에 오히려 기회가 일찍 왔다”고 잘라 말한다. 최 회장은 늘 큰 건설회사를 경영하는 꿈을 갖고 있었다. 그는 외환위기라는 소용돌이 속에서 용케 기업 인수 ·합병(M&A)의 기회를 잡고 간절한 소망을 앞당겨 이뤘다. 최 회장은 그래서 자신은 애당초 ‘새우’가 아니라 ‘새끼 고래’였다고 말한다. 인수자금 마련 못해 음식점 팔기도 최 회장은 우성그룹을 이끌었던 최주호 회장의 조카다. 전북 임실 출신으로 전주고와 명지대 경영학과를 나와 우성건설에서 사업이사를 지냈다. 10년 넘게 일했던 우성건설을 나와 협승토건을 세운 그는 주로 우성건설의 하청공사를 맡았다. 우성건설은 최 회장의 사촌동생이자 최주호 회장의 장남인 최승진씨가 설립한 회사다. 1990년대초까지 주택건설부문 1∼2위를 다투던 우성건설은 유통 ·제조업 등으로 발을 뻗쳤다가 과도한 채무 때문에 주저앉고 만다. 96년 우성건설이 부도나자 최 회장은 ‘모기업 인수’를 시도했다. 2000년 2월 ‘우성건설 인수준비위원회’를 구성, 미수금을 현물로 출자해 우성을 인수한다는 계획을 세웠다. 이를테면 ‘하청업체 연합군’이 원청업체를 인수한다는 기발한 구상이었다. 그러나 보수적인 건설업계 풍토에서 쉬운 일이 아니었다. 게다가 법원은 우성의 특수 관계인인 최 회장이 인수준비위원장으로 나온 데 대해 특혜 시비가 일어날 수 있다며 협상을 거부했다. 결국 우성건설 인수 건은 최 회장에게 ‘가슴 아픈 과거’가 됐다. 그렇게 1년여를 와신상담하며 보낸 최 회장은 한신공영 인수에 공을 들였다. 지난 50년 출범해 건설 1세대로 꼽히는 한신공영은 97년 5월 부도나기 전까지 아파트 건설 명문으로 이름을 떨치던 회사였다. 한신공영은 아파트라는 말조차 낯설던 50년대부터 아파트를 지어왔다. 단일 단지로는 가장 규모가 컸던 신반포 한신타운이 바로 한신의 작품. 지금까지 전국에 18만 가구가 넘는 아파트를 공급해왔다. “우성건설의 역사는 한신공영보다 20여 년이나 뒤지지만 두 회사는 여러모로 닮은꼴이었습니다. 외형도 비슷했고 특히 주택부문에서 경쟁력이 탁월했어요. 한신공영 역시 우성건설처럼 건설과 유통 사업부문이 함께 묶여 있었는데 시너지 효과가 없는 결합이었지요.” 2001년 8월. 최 회장에게 기회가 왔다. 한신공영의 채권단과 법원은 한신공영의 건설과 유통부문을 분할 매각하기로 결정했다. 2001년 10월 유통부문은 우선협상대상자인 세이브존 컨소시엄과 양해각서(MOU)를 체결하면서 새 주인을 맞았다. 건설부문 역시 비슷한 시기에 최 회장이 대주주인 코암C&C개발 컨소시엄과 MOU를 맺었다. “코암C&C개발이라는 구조조정 전문회사를 설립해 우선협상대상자로 선정됐습니다. 하지만 인수할 돈이 모자라 채권단과 협상→중단→재협상을 반복해야 했습니다. 2001년 8월 시작된 인수 협상은 지난해 10월에야 끝났어요.” 최 회장의 표현대로 ‘면장 ‘빽’도 동원하지 않았기 때문에’ 인수 협상은 자그마치 16개월이나 걸렸다. 인수할 돈이 문제였다. 납입자본금 650억원을 포함해 4,000억원대 인수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개인적으로 경영하던 음식점인 ‘한국관’ 10여 곳을 처분하기도 했다. 연간 300억∼500억원의 매출을 올려주던 쏠쏠한 사업을 포기한 것. 인수 과정은 말 그대로 전쟁이었다. 자금을 외환은 평생 사업입니다 마련하는 한편 루머와도 싸워야 했다. 특히 한신공영 임원진의 반발이 심했다. 우선협상대상자로 선정되고 나서도 기업가치 재평가를 두 번이나 더 해야 했다. 자산관리공사측에서도 “이렇게 심한 경우는 처음”이라고 말했을 정도였다. “한 번은 코암C&C측의 자문회사였던 아서앤더슨이 ‘우선협상대상 선정을 취소한다’는 공문을 보내왔어요. 대주주인 자산관리공사도 아니고 법원도 아닌, 우군(友軍)이 벌인 일이라니 믿기지 않았지요. 결국 한신공영 임원들의 ‘공작’으로 외환은 평생 사업입니다 밝혀졌지만요.” 우여곡절 끝에 최 회장은 대형 건설사 인수라는 오랜 꿈을 이루었다. 뚝심 센 최고경영자가 사령탑을 맡으면서 한신공영은 가파른 상승 커브를 그리고 있다. 무엇보다 재무구조가 좋아졌다. 1조원대에 이르던 빚은 2,000억원 수준으로 줄었다. 반면 임직원들의 임금은 올랐다. “말 그대로 ‘어게인(again) 한신’이 필요했어요. 그러려면 임직원들 사기부터 올려야죠. 건설업계에서 15%대 임금 인상을 한 회사는 한신이 유일할 겁니다.” 외환은 평생 사업입니다 지금이야 ‘통 큰 경영’으로 유명하지만 지난해 12월 취임 초기 최 회장의 모습은 여간 깐깐하지 않았다. “어지간하면 바깥에서 식사 약속을 잡지 않았어요. 그때는 10원 단위까지 직접 결재를 했어요. 회사를 빨리 파악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또 결재를 하면서 직원들의 고충을 직접 들을 수도 있었지요.” 물론 지금은 대부분의 결재 권한을 팀장급에 넘겼다. 최 회장은 그러면서 직접 수주전에 뛰어들었다. 지금도 수시로 지방 출장에 나선다. ‘건설회사는 수주를 먹고 자라니, 무엇보다 수주에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는 게 최 회장의 소신이다. 최 회장은 전주시 인후동 주공아파트 재건축 수주 건을 생생하게 기억한다. 모두 929가구, 1,100억원대 규모의 공사로 지방치곤 꽤 큰 수주 건이었다. “한신을 포함해 모두 3개 회사가 경쟁했는데 한 경쟁업체에서 한신은 자본금이 45억원이고 부채비율이 530%인 부실회사라는 비난광고를 했어요. 그러면서 2002년 9월 현재 금융감독원 발표라고 짤막한 자막을 달았더군요.”최 회장은 총회장에서 직접 마이크를 잡고 “어디까지나 2002년 9월까지 얘기”라며 조합원들을 설득했다. 현재 한신은 자본금 495억원, 부채비율은 154%에 불과한 우량회사로 변신했다며 제안서를 읽어 내려갔다. 조합원 총회는 12시간 동안 계속됐고, 527명 가운데 363표(68.8%)를 얻은 한신이 경쟁사를 여유 있게 따돌렸다. 최 회장이 올해 목표했던 수주액은 8,000억원. 5개월도 되지 않아 이미 목표를 초과 달성했다. 5월말까지 공시한 금액만 1조500억원. 협상은 끝났지만 계약서를 쓰지 않은 것까지 더하면 2조원에 육박한다는 것이 회사 관계자의 귀띔이다. 최 회장의 당면 목표는 잠원동 한신아파트 재건축 수주다. 6월말 한신공영은 서울사무소를 현재 충무로 극동빌딩에서 잠원동 65-3번지 옛 본사 자리로 옮긴다. 수주 의지가 그만큼 강하다. “지난 72년부터 20여 년 동안 한신공영이 본사로 쓰던 곳입니다. 신반포 한신타운을 개발하면서 한신은 아파트의 대명사가 됐습니다. 재건축 수주에 성공해 한신이란 이름이 건재하다는 것을 알리겠습니다.” 수주도 수주지만 최 회장은 ‘다음 M&A’에도 관심이 많다. 최 회장은 “그동안 민간 건축 위주로 수주하다보니 관급 공사나 토목공사가 적었다”며 “두 부문에서 균형을 맞추려고 노력하고 있다”고 말한다. 얼마 전 그는 남광토건 인수전에도 뛰어들었지만 가격 외환은 평생 사업입니다 등이 맞지 않아 포기했다. 그러나 이런 끊임 없는 M&A를 통해 ‘어게인 한신’을 넘어 ‘한신 바람’을 일으킨다는 복안은 지금도 여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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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시간이 계속 늦춰졌다. 약속시간보다 늦게 외환은 평생 사업입니다 도착한 박종범 영산그룹(오스트리아 소재) 회장이 땀을 흘리면서 급하게 들어왔다. 박 회장은 광주광역시에서 열린 제12회 세계한상대회(10월 29~31일)에 참석하기 위해 10월 28일 오스트리아에서 날아와 광주와 서울을 오가면서 시간 단위로 짜여진 일정을 소화하고 있다고 했다.

지난 11월 1일, 서울 강남구 역삼동에 있는 영산그룹 한국지사에서 유럽의 거상(巨商) 박종범(56) 회장을 만났다. 그의 사무실에 놓여 있는 여러 개의 상패 중에 2011년에 받은 대한항공의 ‘밀리언마일러(100만마일 탑승)클럽’ 기념패가 눈에 띄었다. 박 회장은 “이번에 한국에 들어오면서 보니 436번째 탑승이더라”고 했다. 박 회장의 비행기 이동거리는 대한항공보다 유럽 항공사를 이용한 유럽 내 노선이 더 많다. 1년에 출장일이 220일이 넘고 비행기 타는 횟수가 한 달이면 20회가 넘는다고 한다. 땅을 밟는 시간보다 하늘 위에서 보내는 시간이 더 많은 셈이다. 1999년 오스트리아에서 1억원으로 사업을 시작해 2008년 연 매출 1조원을 돌파하기까지 그의 사업은 비행기 이동거리에 비례해 성장한 듯했다. 영산그룹은 한국 자동차를 동유럽·러시아·아프리카 등에 수출하는 등 제조·무역·물류사업을 중심으로 14개국에 진출해 26개의 사업장이 있다. 이번 광주 세계한상대회에서도 영산그룹은 아프리카 말리 정부로부터 군용 트럭 연 500대(6000만달러어치)를 수주하고 덤프트럭 250대(5000만달러)도 주문받았다.

박 회장은 1996년 기아자동차 오스트리아법인 법인장으로 오스트리아와 첫 인연을 맺었다. 1999년 그에게 평생 가장 힘들었던 결단의 순간이 왔다. IMF 외환위기 직후 기아차가 현대자동차에 인수 합병되면서 한국으로 돌아가야 했다. 그는 고국행 비행기 티켓을 끊는 대신 사표를 썼다. 구조조정 틈바구니에서 그가 돌아갈 자리는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오스트리아에 남기로 결정하면서 두 가지 결심을 했다. “하나는 기아차의 배지를 마음속에서 떼내는 것, 두 번째는 자동차를 잊자는 것이었습니다. 그동안 대기업이 저를 만나준 것은 기아법인장으로서이지 개인 사업자로 찾아가봤자 만나줄 리가 없잖습니까. 겸손하게 바닥부터 시작하자고 결심했습니다.”

어떤 사업을 할까 고민하던 그가 찾은 아이템은 사탕포장용 필름이었다. “오스트리아, 독일 등 선진국은 시스템이 잘 갖춰져 있어서 뚫고 들어가기가 어려워 동유럽 시장을 목표로 삼았습니다. 당시 동유럽은 국영기업들이 사기업으로 바뀌면서 틈새가 보였습니다. 그중에서도 삼성, LG 등 대기업이 눈을 안 돌리는 시장을 찾아보니 우크라이나의 대형 사탕공장이 보였습니다. 여직원 한 명 데리고 시작해서 운 좋게 사탕 포장비닐 25만달러어치 수주를 따냈어요. 김포에 있는 공장에서 만들어 와서 우크라이나 사탕공장에 팔았습니다.”

사탕 봉지뿐만 아니라 카메라 필름, 포장지, 원목용 PVC 필름 등 석유화학제품으로 만든 온갖 포장지를 모두 취급했다. 박 회장은 “세상에 그렇게 많은 종류의 포장지, 필름류가 있다는 것을 그때 처음 알았다”고 말했다. 1년여 잘나가는 것 같던 사업에 큰 위기가 찾아왔다. 사탕 포장비닐에 프린팅을 하는 실린더 마모로 165만달러어치 클레임을 맞았다. 공장 주인은 사라지고 없고 박 회장이 고스란히 손실을 떠안아야 했다. 불량제품 중에서도 쓸 만한 것을 일일이 골라내고 클레임 액수를 50만달러로 낮췄다. “2년 내 갚겠다는 약속을 하고 월별로 상환스케줄을 짠 다음, 기록한 종이를 가슴 가장 가까운 주머니에 항상 넣고 다녔습니다. 그때 마음고생한 것은 말로 다 못하지요. 매일 2시간 정도밖에 못 잤는데도 자고 일어나면 온몸이 땀범벅이 됐어요. 큰 수건을 둘둘 말고 잤는데 흠뻑 젖을 정도였어요.”

고생의 끝은 있었다. 2년 상환약속이 2년 반으로 늦어지긴 했지만 2004년 박 회장은 정직하게 빚을 정리한 대가로 우크라이나 거래공장의 신뢰를 얻었다. 우크라이나 측 바이어는 “박 사장의 전공이 원래 자동차 아니냐”면서 우크라이나 자동차 회사를 연결해주었다. 불행을 기회로 바꾼 것이다. 당시 한국 자동차들이 유럽 시장을 질주하기 시작할 때였다. 박 회장은 한국 자동차를 해체한 후 부품 상태로 들여와 완성차로 만들어 우크라이나 자동차 회사에 공급했다. 부품 상태로 수입하면 관세가 훨씬 낮았다. 거기다 자금력이 약한 동유럽 바이어들을 위해 오스트리아 은행권을 연결해주었다. 차를 담보로 박 회장이 신용개설자가 된 후 자금지원을 도와주자 자연스럽게 모든 창구는 박 회장이 됐다.

그때부터 영산그룹은 날개를 달았다. 2005년 자동차 수출을 시작하고 바닥에서 시작해 2008년 연 매출 1조원을 돌파했다. 자동차뿐만 아니라 엔진오일, 부동액 등 자동차 관련 물품도 취급했다. 슬로바키아, 전주를 비롯해 러시아, 말리에 자동차 조립 공장이 있다. 최근에는 말리, 세네갈, 리제르, 기니 등 아프리카 지역 공략에 집중하고 있다. 1999년 여직원 한 명을 두고 시작해 14개국에서 일하는 직원이 1000여명으로 늘었다. 박 회장의 꿈은 영산그룹을 유럽을 넘어 세계의 기업으로 키우는 것이다.

박 회장은 사업성공의 조건으로 무엇보다 ‘신뢰’를 꼽았다. “유럽은 아메리칸드림이 안 통합니다. 인건비가 상상 이상으로 높아서 잠 안 자고 나 혼자 열심히 일한다고 해결되지 않습니다. 유럽은 시스템으로 움직이고 잘 짜여진 사회이다 보니 동양인이 그 틈바구니에서 살아남기도 어렵습니다. 조급하게 생각하지 말고 시간을 두고 원칙에 따라 접근해야 합니다. 품질, 약속, 납기일 등을 지키고 한번 신뢰를 쌓기만 하면 웬만해선 거래를 바꾸지 않는 게 또 그들입니다.”

현재 유럽한인총연합회 회장을 맡고 있는 박 회장은 오스트리아 유학생을 위해 장학금을 지원하는 등 한인사회에서도 큰 역할을 하고 있다. 동포들이 힘을 모은 오스트리아 한인문화회관을 짓는 데도 큰 역할을 했다. 그는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어려웠던 선택도, 가장 잘한 선택도 고국행 대신 오스트리아에 남은 일이었다고 했다. 죽을 만큼 힘들었지만 고생에 대한 대가로 세상은 ‘박종범’이라는 이름을 기억하기 시작했다. 박 회장은 “올해 상복이 터졌다”고 했다. 4월 오스트리아 연방정부에서 금장훈장, 10월 한국에서 국민훈장 모란장을 받았고 모교인 조선대학교에서 지난 9월 명예경영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15년차 금융인, 인터넷은행의 매력을 말하다

케이뱅크를 장식하는 수식어는 화려합니다. ‘대한민국 1호 인터넷 은행.’ 국내 금융의 새 장을 연 기업이죠. 금융업계에 관심이 있는 분들이라면 누구든, 케이뱅크의 성장을 지켜보고 계셨을 겁니다. 동시에 인터넷 은행에서는 어떤 사람들이 일하고 있는지 궁금하셨을 텐데요.

케이뱅크 수신외환팀에서 근무하는 혜령님은 15년차 금융인입니다. 한국외환은행에서 International PB가 되기 위한 커리어를 준비해왔죠. 리테일 금융(Retail Banking, 개인 및 개인사업자들을 대상으로 하는 금융 업무)으로 업계 커리어를 시작했습니다.

금융업에 대한 이해를 넓히고 나서는 외국인 직접 투자 업무와 외환을 담당했는데요. 은행과 관련한 법규를 이해하는 것뿐만 아니라 외국어 구사능력이나 세금관련 지식도 필요했죠. 많은 공부가 필요한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열정적으로 노력한 결과, 혜령님은 책임자급으로 승진해 대사관 거래나 VIP 자산관리도 전담합니다.

그랬던 혜령님은 2018년도 상반기, 돌연 인터넷 은행인 케이뱅크에 입사했습니다. 흔히 말하는 ‘메이저은행’에서 커리어를 쌓아왔지만 인터넷 은행으로 눈을 돌리게 된 것이죠. 15년차 금융인이 말하는, 케이뱅크의 장점은 무엇일까요? 자세한 이야기를 들어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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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령님이 케이뱅크라는 새로운 선택을 하게 된 배경을 살펴보려면, 그녀가 왜 은행업계에서 일하게 되었는지부터 들어봐야 합니다. 왜 금융업이었을까요. 사회초년생 시절, 한 금융업계 선배가 했던 조언이 혜령님의 마음을 움직였다고 합니다.

“금융환경은 항상 변화해요. 정체되어 있지 않은 금융환경에 적응하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자기계발을 해야 하죠. 그래서 다른 직종보다 업무 강도가 높지만, 꾸준한 성장이 있는 분야라는 게 매력적이었어요.”

혜령님을 사로잡았던 키워드는 ‘변화’와 ‘꾸준한 성장’이었던 것 같습니다. 인터넷 은행의 매력도 바로 ‘변화’에 있으니까요. 이제 고객들은 은행이 제시하는 상품이나 서비스를 수동적으로 선택하지 않습니다. 직접 찾아보고, 학습한 후에 은행을 선택하죠. 이런 능동적인 고객들이 많아지면서 혜령님은 은행도, 그리고 스스로도 변화가 필요하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이러한 혁신을 가능하게 한 건 케이뱅크의 주주사들 덕분이기도 합니다. 통신과 금융 분야에서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KT와 우리은행을 중심으로, ICT와 금융, 플랫폼, 지급결제 및 보안, 핀테크 분야 등 21개 리딩기업들이 케이뱅크의 주주사로 참여하고 있습니다. 혜령님은 이처럼 ICT선도기업이 함께 이끌어가는 은행에서 혁신을 만들어내고 싶었다고 합니다. 안정적인 일반 은행에서는 느낄 수 없는 성취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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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환 서비스를 개발하거나 개선할 때, 외국환거래법규 및 관련 국제법을 검토하고 서비스 방향성을 논의해요. 고객금융센터 직원 대상으로 외국환교육 프로그램을 진행하기도 하죠. 금융감독원, 한국은행, 은행연합회 같은 대외기관과 제휴사 관련 이슈에 대응하는 것도 제 역할입니다.”

정책을 맡고 있는 팀과 사업을 맡고 있는 팀 간의 협업이 중요하다고 합니다. 케이뱅크는 외환은 평생 사업입니다 사업을 확장해나가는 중이기 때문에, 정확하고 효율적인 소통은 더욱 필수적이라고요. 그렇다면 업무에 있어서 일반은행과 특별히 차이가 있을까요?

“거의 모든 업무가 온라인으로 진행되죠. 그래서 일반 은행보다 IT 관련 부서의 역할이 커요. 금융 지식뿐만 아니라 IT 지식도 필요해요. 제가 속해있는 사업 부서만 놓고 본다면, 고객의 거래 양상과 데이터를 분석하는 능력이 필수적입니다. 뿐만 아니라 UX/UI에 대한 이해도 있어야 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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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송금서비스 오픈 전이었어요. 고객금융센터 첫 교육을 하던 날이었는데, 큰 박수를 받았던 순간이 가장 기억에 남아요. 많은 분들의 노력이 깃든 서비스가 직원분들에게 먼저 인정을 받았다는 생각에 가슴이 벅찼죠.”

케이뱅크 해외송금서비스는 고객편의성 제고에 기여한 점을 인정받아 금융위원회 혁신상을 수상했습니다. 미국, 캐나다, 유럽, 아시아 등 18개국, 8종류 통화로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죠. 저렴한 수수료와 이용 편의성이 입소문을 탔습니다. 국내에서 자동이체를 하듯 사용이 편리한데다 한시적으로 수수료 무료 이벤트를 진행했다고요.

혜령님은 케이뱅크에서 많은 보람을 느끼고 있다고 합니다. 시니어로서 연차가 높은데도 업무를 하면서 ‘가슴 외환은 평생 사업입니다 벅찬’ 경험을 할 수 있다는 것. 결코 쉬운 일이 아니죠. 여전히 실무자로서 배울 것이 많고, 새로운 것들을 만들어나가면서 느끼는 성취감이 혜령님을 더 자라게 한다고요.

“케이뱅크에서 많이 배웠어요. 기존 은행에서는 제 연차가 되면 배울 일보다 제 기존 지식이나 경험을 전달하는 일이 더 많은데요. 인터넷전문은행에서는 새롭게 공부하는 분야가 생기고, 동료와의 관계에서도 색다른 방식의 소통이 일어나요. 젊은 조직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앞으로의 목표는, 익숙해지지 않는 거예요. 항상 연구하고 노력하는 사람이 되는 것. 이거 하나면 제 나이와 상관없이 계속 젊은 직원으로 남을 수 있을 것 같아요. 이 글을 읽는 모든 분들도 보람을 느끼는 직장생활을 하셨으면 해요!”

유네스코한국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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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네스코한국위원회 ( 사무총장 민동석 ) 는 지난 22 일 서울 명동 유네스코회관에서 외환은행나눔재단 ( 이사장 김한조 ) 과 함께 인도 소외계층 여성 문해교육을 위한 지원금 전달식을 가졌다 .

인도 소외계층 여성 문해교육은 유네스코한국위원회가 추진하는 ‘ 유네스코 아시아 브릿지 사업 ’ 의 일환으로 , 아시아 저개발국의 현지기관과 협력해 교육을 통한 빈곤 퇴치를 실현하는 국제적인 공익사업이다 . 지원금은 인도 동부에 위치한 우타르 프라데시 주 바라나시 지역에 거주하는 소외계층 여성 ( 불가촉천민 , 이슬람집단 ) 600 여명의 교육권 강화와 사회적 권리 및 환경 개선을 위해 약 1 년 간 쓰일 예정이다 .

외환은행은 인도시장의 금융수요에 부응하기 위해 2008 년부터 운영해 오던 뉴델리사무소를 지난 3 월 11 일 지점으로 전환해 영업하고 있다 . 해외영업망 진출 국가에 대한 인도적 차원으로 유네스코한국위원회와 함께 인도 소외계층 여성 문해교육을 지원하기 위해 이번 기금을 전달했다 .

이번 지원금 전달식에는 민동석 유네스코한국위원회 사무총장과 진성오 외환은행나눔재단 상근이사를 비롯한 관계자 10 여명이 참석했다 .

유네스코한국위원회 민동석 사무총장은 “ 외환은행나눔재단과 함께하는 인도 소외계층 여성 문해교육 지원사업은 빈곤 속에서 글 읽기와 쓰기 등의 기초적인 교육조차 받지 못하고 있는 인도 여성들에게 큰 도움이 될 것 ” 이라며 , “ 앞으로도 지구촌 곳곳의 소외된 이웃을 위한 많은 관심과 후원을 기대한다 ” 고 밝혔다 .

영월평생학습 로고

“아무리 하찮고 평범하게 산 사람이라도 삶의 경험은 단 하나밖에 없기 때문에 소중한 것 아니겠습니까?” 한동창(81) 어르신의 말에 관악구가 2011년 전국 최초로 시작한 어르신 자서전 출간 사업의 의미가 들어 있다. 흔히 자서전이나 전기는 유명한 사람만 남기는 것처럼 인식되어왔다. 그러나 이는 고정관념에 불과하다. 아무리 큰 강물도 수만 수천 갈래의 시냇물이 모여서 이루어진 것처럼 역사의 강물 역시 민초들의 삶이 모여서 도도히 흘러가는 것이다. 그래서 외환은 평생 사업입니다 평범한 사람의 인생도 자서전이 되고 역사가 된다.
언뜻 평범하게 보이는 사람도 지나온 인생행로를 더듬어보면 결코 평범하지가 않다는 것을 금방 알게 된다. 일제치하와 8·15해방, 분단과 6·25전쟁, 4·19혁명과 5·16쿠데타, 베트남 참전과 중동건설 참여, 오일쇼크와 IMF외환위기 등 한국 현대사의 굵직한 사건들이 평범한 사람의 삶에 녹아 있다. 발에 차이는 돌덩이 하나에도 지구의 역사가 들어 있는 것처럼 어느 보통사람의 삶도 한국 현대사의 훌륭한 단면이 된다.

자서전을 쓰면서 자신의 과거와 화해하는 것도 색다른 경험이다. 망설임 끝에 용기를 내어 자서전을 쓴 어르신은 “나의 지나간 과거를 찬찬히 돌이켜보니 내 인생도 생각보다는 훨씬 가치가 있다는 것을 깨닫고 큰 위안을 받았습니다. 자손들에게 일일이 말할 수 없었던 굴곡진 인생 궤적을 한 권의 책으로 남기니 가슴이 굉장히 뿌듯해요”라고 말했다. 누구에게나 결정적 순간이 있다. 그 순간에 어떤 고민을 하고 어떤 판단 하에 어떤 결단을 내렸는가, 이는 사람의 인생 판도를 확 바꾼다. 유네스코 기록유산만 기록유산이 아니다. 이런 경험을 기록으로 남기면 기록유산이 된다. 팔순잔치 때 수건 대신 자서전을 돌렸더니 가족 친지 친구들의 대접이 달라지더라는 후일담은 공통점. 한마디로 참여자의 만족도가 대단히 높음을 알 수 있다.
해방 후 부부가 빨치산 활동을 하다 남편은 죽고 자신은 체포되어 파란만장한 생을 이어온 박정덕(86) 할머니. 반면 빨치산 토벌작전에 동원되었던 김관영(87) 할아버지. 역사의 현장에서 대척점에 섰던 이분들은 같은 관악구민으로 한 날 한 시 한 장소에서 자서전 출판기념회를 가지면서 이런 사실을 확인하고서 손을 맞잡았다. 한국 현대사의 아픔을 감동으로 승화시키는 순간 나도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박정덕 할머니는 “나도 젊은 시절 꿈이 있었는데, 죽은 뒤 이 세상에 왔다 간 흔적도 없을 뻔 했어요. 그런데 구청의 도움으로 내 인생의 자취를 남기게 되어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어요”라며 환하게 웃었다. 구귀순(71) 할머니는 맏며느리로 병든 시어머니를 모시면서 딸만 일곱을 낳아 길렀는데, 아들 선호 분위기에서 딸들을 눈물로 훌륭하게 길러낸 사연을 ‘일곱 개의 보석’이라는 제목의 자서전으로 남기면서 행복한 표정을 지었다. 탈고한 후 바로 생을 마감한 분도 두 분 계신다. 매우 애석한 일이지만, 또 다른 한편으론 자손들에게 마지막 선물로 자서전을 남긴 셈이니 아름다운 마무리라 말할 수 있겠다.
자서전 사업은 2010년 구청장 출마 때의 공약이다. 구청에서 비용의 절반 정도를 지원하고, 전문 사회적기업인 희망사업단에서 주인공의 구술을 토대로 집필을 도와주거나 대필을 해준다. 두께는 크게 신경 쓰지 않아도 좋다. 지금은 여러 자치단체로 확산되는 중. 지난 7년 동안 출간되어 관악구 도서관에 영구 보관된 자서전은 모두 58권. 똑같은 인생은 없다. 의미 없는 인생도 없다. 누구나 자서전을 남겨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 본 글은 본지 자문위원이자 객원논설위원으로 활동 중인 유종필 관악구청장(前 전국평생학습도시협의회장)의 '유종필의 관악소리' 27화(17.01.31)에 실린 글을 본지에 공유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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